베이징
관광명소
원명원

중국과 유럽 양식이 혼합된 청나라 황제들의 정무지 겸 정원

청나라 황제의 별궁으로 사용된 정원원명원은 청의 강희제가 아들에게 제공한 여름 별장 궁으로, 아들 옹정제가 황위에 오르면서 궁내 시설과 정원을 정비해 사용하였다. 이후 원명원의 동쪽으로 큰 규모의 정원인 장춘원, 기춘원이 추가되어 자금성과 이화원을 합친 크기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정원으로 거듭났다. 청대에는 황제의 실제 정무 장소 및 주거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한다.

아픈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곳원명원과 장춘원, 기춘원에서는 여러 개의 호수와 누각 등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지만, 아편 전쟁을 거치며 공원 내 일부 전각, 다리 등의 시설이 불타고 많은 유적이 약탈당해 없어진 상태의 모습도 볼 수 있다. 유럽 정원 건축 장인이 설계한 장춘원은 중국 최초의 서양식 정원이며, '동양의 베르사유'라고도 불리웠으나 현재는 그 터의 흔적만 남아있다.
여담
3.5km^2의 면적에 서양식 건축물, 중국 각 지방의 건축 양식을 모아놓은 건물들이 있었으며, 만원지원(萬園之園, 만 개 중의 정원, 정원 중의 정원)이라고도 불렸다. 또한 청 황실에서 소장한 진귀한 보물과 동식물을 보관한 장소이기도 했다.
유럽식 건축양식의 서양루 등은 유럽인들이 참여하여 설계했다.
1860년 2차 아편전쟁 도중 프랑스군의 약탈에 이어, 포로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군의 공격으로 불에 타 소실되고 소장품들은 모두 약탈당했다. 이런 행위에 대해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이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비판했다.
서태후와 함풍제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던 곳이기도 하다. 원명원이 불타 없어진 후 서태후는 거금을 들여 원명원 재건사업을 추진하려고 했으나 재정낭비라는 이유로 동태후가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. 동태후는 서태후와 함풍제의 사랑의 장소가 재건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.